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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황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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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인 황제 시대는 3세기 로마 제국에서 군대가 황제 선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혼란이 심화된 시기를 지칭한다. 2세기 오현제 시대 이후 국력이 약화되고, 황제 계승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군대의 지지를 받는 장군들이 권력을 잡으려 하면서 내전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세베루스 왕조 몰락 이후, 로마는 잦은 내전을 겪으며 쇠퇴했고, 이민족의 침입과 경제적 위기까지 겹쳐 제국은 분열의 위기에 직면했다.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위에 오르면서 사두정치 체제를 도입하여 혼란을 종식시키고 제국을 재건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2. 역사적 배경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소위 "오현제 시대") 치하에서 로마 제국은 전례 없는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오현제 시대 후기부터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마지막 황제 코모두스의 폭정으로 왕조는 붕괴되었다. 이후 내전을 거쳐 세베루스 왕조가 성립되었으나, 이 왕조 역시 군사력에 의존하는 불안정한 통치를 이어갔다.[3][4][5][6]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군단의 급여를 인상하고 군대에 상당한 도나티붐을 제공했다.[4][5] 그의 아들 카라칼라 역시 군대의 충성을 유지하기 위해 연간 급여를 인상하고 많은 혜택을 베풀었다.[7][8][9]

외국과의 전쟁보다는 약탈적인 적과 내전으로 인해 로마 제국은 방어적인 입장에 놓였다. 잦은 내전은 군대의 병력 고갈에 기여했고, 대체 병력 징병은 노동력을 더욱 압박했다. 여러 전선에서의 전투, 군대의 규모와 급여 증가, 운송 비용 증가, "빵과 서커스" 와 같은 대중주의적 정치,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세금 징수, 평화를 위해 외국에 돈을 지불하는 등의 모든 것이 재정 위기에 기여했다.[11]

2. 1. 군인 황제 시대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가 군대에 의해 암살되면서 군인 황제 시대가 시작되었다. 군대의 지지를 받은 수많은 군인 황제들이 난립하면서, 제국의 권위는 추락하고 내전이 빈번하게 발생했다.[13] 이 시기 황제들은 대부분 군사적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었으며, 짧은 재위 기간과 잦은 교체는 제국의 안정을 저해했다.

로마 제국은 235년에 국경을 넘어 침략하는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많은 로마 군단이 패배했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는 주로 사산 제국의 위험에 집중하면서 심각한 상황에 놓였다. 알렉산데르 황제는 직접 병력을 이끌고 외교와 조공을 사용하여 군사적 정복보다는 빠르게 게르만 족장을 진정시켰다.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이것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에게 그의 군대의 존경심을 잃게 했고, 군대는 로마 영토를 침범한 부족에게 더 가혹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12] 군대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암살하고 당시 주둔하고 있던 군단의 지휘관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새로운 황제로 선포했다.

막시미누스는 막사 황제의 첫 번째 인물로, 정치적 경험, 지지 파벌, 뛰어난 조상, 또는 황제 자리에 대한 세습적 주장을 갖지 않고 군대에 의해 등용된 통치자였다. 그들의 통치는 군사력과 장군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대에 의존하는 군벌로 활동했다. 막시미누스는 게르마니아에서 군사 작전을 계속했지만 제국 전체에 대한 그의 권위를 행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수많은 로마 장군들이 제국을 장악하기 위해 서로 싸웠고 침략으로부터 그것을 방어하는 의무를 소홀히 했다. 라인 강과 다뉴브 강 국경을 넘어 카르피족, 고트족, 반달족, 알레만니족을 포함한 외국의 부족들의 잦은 습격이 있었고, 동쪽에서는 사산 왕조의 공격도 있었다. 기후 변화와 해수면 상승은 현재 저지대 국가의 농업을 파괴하여 이 지역에 거주하는 부족들이 로마 영토로 이주하도록 강요했다.[18]

2. 1. 1. 황제 계승 문제

원수정 초기부터 황제 계승에 대한 명확한 규칙은 없었다. 이는 제국이 공화국의 외관을 유지했기 때문이다.[26]

원수정 초기에 황제가 되는 과정은 원로원의 선포, 민중의 지지, 그리고 군대, 특히 프라이토리아 근위대의 승인을 모두 받아야 했다. 이전 황제와의 가족 관계는 유리했지만, 세습 제도의 공식적인 방식처럼 문제를 결정하지는 않았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이후, 원로원이 선호하는 인물과 군대 간에 때때로 긴장이 발생했다. 원로원 계급의 정치적 영향력이 감소하고 더 많은 장군들이 속주에서 충원되면서, 이러한 긴장은 더욱 심화되었다.

계승이 불확실해 보일 때마다 상당한 규모의 군대의 지지를 받는 모든 장군들은 권력을 잡으려 시도하여 내전을 촉발할 유인이 있었다. 위기 이전의 가장 최근의 사례는 오현제의 해였으며, 이로 인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승리했다. 세베루스 왕조가 몰락한 후, 3세기 남은 기간 동안 로마는 빈번한 내전을 통해 권력을 잡은 일련의 장군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이로 인해 제국은 황폐해졌다.[27]

3. 위기의 원인

3세기 로마 제국에 대한 야만족 침략


3세기의 고트족 습격


군인 황제 시대의 위기는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 '''정치적 요인:''' 황제 계승 규칙의 부재는 빈번한 내전과 찬탈을 야기했고, 이는 중앙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군대의 정치 개입 심화는 이러한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 '''군사적 요인:''' 게르만족사산 왕조 페르시아 등 이민족의 침입은 로마 제국의 방어 능력을 시험대에 올렸다. 특히, 251년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데키우스 황제가 전사하는 등 잦은 패배는 제국의 위신을 실추시켰다.
  • '''경제적 요인:''' 잦은 전쟁과 약탈은 로마 제국의 경제 기반을 파괴했다. 팍스 로마나 시대에 번성했던 무역망은 붕괴되었고,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화폐 가치 하락은 경제 위기를 심화시켰다.
  • '''사회적 요인:''' 251년 키프리아누스 역병 (아마도 천연두)은 대규모 사망을 야기하여 제국의 인구를 감소시키고 사회 기반을 약화시켰다.[19][20]


이러한 요인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제국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예를 들어, 정치적 불안정은 군사적 대응 능력을 약화시켰고, 이는 다시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3. 1. 정치적 요인

빈번한 황제 교체와 내전은 중앙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제국의 행정 및 군사 시스템을 마비시켰다. 군대의 정치 개입 심화는 군사 쿠데타와 찬탈의 악순환을 초래했다.[27]

로마 제국원수정 초기부터 제위 계승에 대한 명확한 규칙이 없었다. 이는 제국이 공화국의 외관을 유지했기 때문이다.[26]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원로원의 선포, 민중의 지지, 그리고 군대(특히 프라이토리아 근위대)의 승인이 필요했다. 이전 황제와의 가족 관계는 유리했지만, 세습 제도의 공식적인 방식처럼 문제를 결정하지는 않았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이후, 원로원이 선호하는 인물과 군대 간에 때때로 긴장이 발생했다. 원로원 계급의 정치적 영향력이 감소하고 더 많은 장군들이 속주에서 충원되면서, 이러한 긴장은 더욱 심화되었다.

계승이 불확실해 보일 때마다 상당한 규모의 군대의 지지를 받는 모든 장군들은 권력을 잡으려 시도하여 내전을 촉발할 유인이 있었다. 위기 이전의 가장 최근의 사례는 오현제의 해였으며, 이로 인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승리했다. 세베루스 왕조가 몰락한 후, 3세기 남은 기간 동안 로마는 빈번한 내전을 통해 권력을 잡은 일련의 장군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이로 인해 제국은 황폐해졌다.[27]

군대는 충성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뇌물을 요구했다.[3]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군단의 급여를 인상하고 군대에게 상당한 도나티붐을 제공했다.[4][5] 군사비 지출의 대규모적이고 지속적인 증가는 그의 모든 후계자들에게 문제를 야기했다.[6] 그의 아들 카라칼라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그들의 충성을 유지하기 위해 연간 급여를 인상하고 군대에게 많은 혜택을 베풀었으며,[7][8][9] 공동 통치에서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형제 게타와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주요 영향으로 제국의 분할은 불가능했다.[10]

235년세베루스 왕조가 군대의 쿠데타로 붕괴되면서, 제국은 "'''군인 황제 시대'''"라고 불리는 대혼란기에 돌입한다. 군인 황제 시대에는 군대의 추대를 받은 무수한 '''군인 황제'''가 난립했고, 후에 원로원의 승인을 받은 정식 황제만 21명, 찬탈자를 포함하면 무려 40명이 넘는 황제가 즉위했다.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는 황제 선출에 대한 명확한 규칙이 없었다는 점이다. 원래 로마에서는 공화정 시대부터 국가 원수가 군대의 최고 사령관을 겸하는 체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화정 시대의 집정관은 제한된 임기가 정해져 있었지만 제정 시대의 황제는 종신직이었고, 설령 군사령관으로서 무능함을 드러내더라도 쉽게 교체할 수 없었으며, 어리석은 황제를 배제하려면 암살, 반란, 쿠데타 등과 같은 강경 수단에 호소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세베루스 왕조가 성립 초기부터 군사 정권적인 성격이 강했던 점[47]과 이민족의 침입이 격화된 점도 겹쳐, 군대가 황제 선출에 힘을 가지게 되었고, 종래 황제 선출의 주체였던 원로원도 군대가 추대한 황제를 사후 추인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따라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면 실력으로 황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의 인가를 받지 않은 참칭 황제도 잇따라 나타났고, 각지에서 권력 다툼의 소규모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제위는 안정되지 않았으며, 불과 1년조차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는 단명 황제도 많이 나왔다.

3. 2. 군사적 요인

게르만족사산 왕조 페르시아 등 이민족의 잦은 침입으로 로마 제국의 국경 방어 체계는 붕괴 위기에 처했다. 잦은 내전으로 군사력이 분산되고 약화된 틈을 타 이민족들은 제국 영토를 침략하고 약탈했다.

로마 제국은 약탈적인 적과 내전으로 인해 점점 더 방어적인 입장에 놓였다. 이는 적국을 약탈하여 얻는 필수적인 수입원을 차단하는 동시에 로마의 시골을 외국인과 국내 약탈자 모두로부터 경제적 황폐화에 노출시켰다. 잦은 내전은 군대의 병력 고갈에 기여했고, 대체 병력 징병은 노동력을 더욱 압박했다.[11]

235년, 국경을 넘어 침략하는 게르만족과의 이전 작전에서 많은 로마 군단이 패배했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는 주로 사산 제국의 위험에 집중했다. 알렉산데르 황제는 외교와 조공을 사용하여 군사적 정복보다는 빠르게 게르만 족장을 진정시켰다.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이것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에게 그의 군대의 존경심을 잃게 했고, 군대는 로마 영토를 침범한 부족에게 더 가혹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12] 군대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암살하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새로운 황제로 선포했다.

이후 수많은 로마 장군들이 제국을 장악하기 위해 서로 싸웠고 침략으로부터 그것을 방어하는 의무를 소홀히 했다. 라인 강과 다뉴브 강 국경을 넘어 카르피족, 고트족, 반달족, 알레만니족을 포함한 외국의 부족들의 잦은 습격이 있었고, 동쪽에서는 사산 왕조의 공격도 있었다.

3. 2. 1. 게르만족의 침입



2세기 후반부터 게르만족은 인구 증가, 기후 한랭화에 따른 거주 환경 악화, 식량 부족 등의 요인으로 로마 제국의 국경을 빈번하게 침범하기 시작했다.[32] 3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침입은 유례없는 대규모로 확대되었다. 게르만족의 침입은 갈리아, 일리리쿰, 다키아, 트라키아 등 북방 국경의 거의 전역에서 발생했으며, 로마 군단은 광범위한 방어선을 지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32]

로마 군대는 여러 차례 황제가 직접 전선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게르만족의 수적 우세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251년 아브리투스 전투에서는 데키우스 황제와 공동 황제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고트족에게 패배하여 전사하는 굴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32] 이후 국경 침범은 더욱 심해졌고, 방어의 핵심이었던 리메스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고트족과 알레만니족은 알프스를 넘어 북부 이탈리아까지 진출했고, 흑해를 통해 소아시아와 그리스의 도시들을 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32]

그러나 로마군은 주력 부대를 게르만식 기병으로 개편하는 등 군사 구조 개혁을 통해 반격을 시도했다. 268년 (또는 269년) 나이수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군사적 우위를 회복했고, 이후 게르만족의 침입은 점차 쇠퇴하는 경향을 보였다.[32]

3. 2. 2.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침입

동쪽에서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파르티아를 멸망시키고 로마 제국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강화했다.[33] 아르다시르 1세224년 사산 왕조를 세운 후, 과거 아케메네스 왕조의 부흥을 표방하며 소아시아에서 로마인의 철수를 요구하며 항쟁을 시작했다. 235/236년에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니시비스와 카르헤를 점령했을 가능성이 높다.[34]

241년 아르다시르가 사망하고 아들 샤푸르 1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페르시아는 다시 공세로 나섰다. 로마는 황제가 직접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출정하여 이를 막았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44년 미시케 전투에서는 고르디아누스 3세 황제가 전사했고, 260년 에데사 전투에서는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겪었다.[33] 253년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의 완충 지대였던 아르메니아 왕국이 페르시아의 세력권에 들어가면서, 페르시아 군은 로마의 동방 국경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샤푸르는 연이은 승리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로마 영토 침공을 계획했지만, 261년 팔미라를 중심으로 한 동방 속주 일대를 다스리는 총독 셉티미우스 오다에나투스의 군대에 대패했다. 이 승리로 페르시아의 침공은 일시적으로 저지되었지만, 이는 훗날 팔미라 지방의 분리 독립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3. 3. 경제적 요인

잦은 전쟁, 약탈, 내전은 로마 제국의 경제 기반을 파괴했다.[11] 로마 제국은 외국과의 전쟁 대신 약탈적인 적과 내전에 직면하여 방어적인 입장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적국 약탈을 통한 수입원을 차단하고 로마의 시골을 경제적 황폐화에 노출시켰다.[11] 잦은 내전은 군대 병력 고갈에 기여했고, 대체 병력 징병은 노동력을 더욱 압박했다.[11]

로마의 평화 이후 번성했던 무역망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화폐 가치 하락과 세금 부담 증가는 경제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35]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군단의 급여를 인상하고 군대에 상당한 도나티붐을 제공했으며,[4][5] 그의 아들 카라칼라는 연간 급여를 인상하고 군대에 많은 혜택을 베풀었다.[7][8][9] 이러한 군사비 지출의 대규모적이고 지속적인 증가는 모든 후계자들에게 문제를 야기했다.[6] 여러 전선에서의 전투, 군대 규모와 급여 증가, 운송 비용 증가, "빵과 서커스"와 같은 대중주의적 정치 캠페인,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세금 징수, 조직화되지 않은 예산 편성, 그리고 평화를 위해 외국에 돈을 지불하는 것 등이 모두 재정 위기에 기여했다. 황제들은 적자를 메우기 위해 자산과 물품을 몰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11]

세베루스 황제 치하에서 시작된 통화 평가절하로 인해 제국은 내부적으로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직면했다.[35] 단명한 황제들은 군대의 "즉위 보너스"를 지급하기 위해 통화를 팽창시키는 쉬운 방법을 택했고, 이로 인해 물가가 폭등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권력을 잡을 무렵, 로마 제국의 옛 통화는 거의 붕괴되었다. 일부 세금은 현물로 징수되었고, 가치는 금괴나 청동 주화로 표시되었다. 실질 가치는 금화로 계속 계산되었지만, 300년 동안 사용된 은화인 데나리는 사라졌다(금 1파운드 = 금 아우레우스 40개 = 데나리 1,000개 = 세스테르티 4,000개). 이 통화는 3세기 말에는 거의 가치가 없었고, 소매 주화 없이 거래가 이루어졌다.

3. 3. 1. 무역망 붕괴

아우구스투스부터 시작된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 시대에 로마 제국의 경제는 지중해 항구 간의 무역과 광대한 도로망을 통한 제국 내륙 무역에 크게 의존했다. 상인들은 몇 주 만에 제국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비교적 안전하게 여행하며, 지방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도시로, 동부의 주요 도시에서 생산된 공산품을 더 시골 지방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37]

그러나 3세기 위기가 시작되면서 이 광대한 내부 무역망은 붕괴되었다. 광범위한 시민 불안으로 상인들이 이전처럼 안전하게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금융 위기로 평가절하된 통화 때문에 교환이 매우 어려워졌다. 이는 중세 시대의 분권화된 경제적 특성을 예고하는 심오한 변화였다.[38]

대규모 토지 소유주들은 더 이상 장거리 작물 수출을 할 수 없게 되자 생계와 지역 물물 교환을 위한 식량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제국의 주요 도시에서 공산품을 수입하는 대신, 자신의 영지에서 많은 상품을 자체 생산하며 자급자족적인 "가정 경제"를 시작했고, 이는 장원제로 이어졌다. 한편, 로마 도시의 자유민들은 식량과 보호를 찾아 시골로 이주했다.[39]

제국 지방 간 상업 감소는 자급자족을 가속화했다. 대규모 토지 소유주들은 특히 서부 제국에서 로마 중앙 권위에 덜 신경 쓰게 되었고, 세금 징수원에게 적대적이었다. 제국 일반 사람들은 토지 소유 귀족에게 경제적, 정치적 지위를 잃었고, 상업 중산층은 무역 관련 생계와 함께 약화되었다.[40]

후기 황제들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로마 무역망은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 (기원전 27년 – 서기 180년) 때의 상태로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이러한 경제적 쇠퇴는 3세기 동안 야만족의 침략을 여러 차례 받은 제국 서부 지역에서 더 두드러졌다.[43]

3. 4. 사회적 요인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 암살 이후, 로마 제국은 심각한 사회적 혼란에 직면했다. 이 시기 제국은 키프리아누스 역병[19][20]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전염병은 천연두로 추정되며, 대규모 사망을 야기하여 제국의 인구를 크게 감소시키고 사회 기반을 약화시켰다.[19][20]

잦은 내전으로 군대의 병력은 고갈되었고, 대체 병력 징병은 노동력을 더욱 압박했다. 키프리아누스 역병[19][20] 창궐은 인구 감소를 가속화하고 사회 혼란을 심화시켰다.

경제 위기와 사회 불안은 도시 인구의 농촌 이주를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는 중세 봉건 사회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제국의 분열과 재통합

235년, 로마 제국게르만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가 암살당하면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알렉산데르 황제는 군사적 정복보다는 외교와 조공을 통해 게르만 족장들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이는 군대의 불만을 샀다.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군대는 로마 영토를 침범한 부족들에게 더 가혹한 처벌을 원했고, 결국 알렉산데르를 암살하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12]

막시미누스는 최초의 막사 황제로, 정치적 경험이나 지지 세력 없이 군대에 의해 옹립된 인물이었다. 그는 군사력에 의존하여 통치했기에 군벌과 다름없었다. 게르마니아에서 군사 작전을 계속했지만, 제국 전체에 대한 권위를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원로원은 농민 출신 황제를 받아들이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13] 이는 6명의 황제의 해라는 혼란을 야기했고, 그동안 모든 황제 후보들이 살해되었다. 238년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아프리카 속주에서 반란을 일으켰고,[14] 로마 원로원의 지원을 받았지만,[15] 곧 진압되었다.[16] 원로원은 푸피에누스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고르디아누스 3세를 카이사르로 세웠지만,[17] 막시미누스는 레기오 2 파르티카에 암살되고,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프라에토리아 군단에 살해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수많은 로마 장군들이 제국을 장악하기 위해 서로 싸웠고, 국경 방어는 소홀히 했다. 라인 강과 다뉴브 강 국경 너머 카르피족, 고트족, 반달족, 알레만니족 등 외국 부족들의 침입이 잦았고, 동쪽에서는 사산 왕조의 공격도 있었다. 기후 변화와 해수면 상승저지대 국가의 농업을 파괴하여 이 지역 부족들이 로마 영토로 이주하게 만들었다.[18] 251년에는 키프리아누스 역병 (천연두로 추정)이 발생하여 대규모 사망자를 내고 제국을 약화시켰다.[19][20] 260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 왕조에 포로로 잡히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찬탈자들이 황제 자리를 노렸다. 중앙 권위가 약화된 틈을 타 제국은 세 개의 경쟁 국가로 분열되었다. 260년 갈리아, 브리튼, 히스파니아의 로마 속주들이 갈리아 제국으로 독립했고, 267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동부 속주들이 팔미라 제국으로 독립했다. 이탈리아 중심의 나머지 속주들은 단일 통치하에 있었지만, 사방에서 위협에 직면했다.[21]

흑해에서 쫓겨난 고트족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침공은 268년 또는 269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가 나이수스 전투에서 격파했다. 역사가들은 이 승리를 위기의 전환점으로 본다. 이후 강력한 막사 황제들이 중앙 권위를 회복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알레만니족을 몰아내고 갈리아 제국으로부터 히스파니아를 되찾았다. 270년 그가 역병으로 사망하고, 아우렐리아누스가 황위를 계승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270–275) 동안 반달족, 서고트족, 팔미라 제국, 갈리아 제국의 잔재를 격파하고 제국을 재통합했다. 274년 말, 로마 제국은 다시 하나의 실체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275년 아우렐리아누스가 암살되면서 다시 짧은 통치의 황제들이 난립했다. 284년 디클레티아누스가 권력을 잡을 때까지 상황은 안정되지 않았다.[22]

4. 1.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

260년의 에데사 전투에서의 처참한 패배는 제국의 약화를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전대미문의 소식은 곧 제국 전역에 퍼져나갔고, 후세에 "30인의 참칭 군주"라고 불리는 무수한 참칭 황제가 난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48]

황제의 난립은 내부 대립에 그치지 않고 국토의 분열까지 초래했다.

260년에는 서방의 속주 총독이었던 포스투무스가 황제를 자칭하며 갈리아에 사실상 독립 국가인 갈리아 제국이 성립했다.

또한, 동방에서도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낸 속주 총독 오데나투스가 사망하고, 그의 부인인 제노비아267년에 아들 와발라투스를 옹립하여 제위를 참칭하면서 팔미라 제국이 탄생했다.

이로 인해 로마 세계는 본래의 로마 제국, 갈리아 제국, 팔미라 제국으로 삼분되었다.

4. 2. 아우렐리아누스의 재통합

274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분열된 제국을 재통합하는 데 성공했다.[22]

아우렐리아누스는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유능한 황제였다. 그는 제국을 재통합한 공로로 원로원으로부터 "'''Restitutor Orbis'''"(세계의 복원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아우렐리아누스의 팔미라 재통합을 기념하는 안토니니아누스 주화

5. 위기의 종식과 디오클레티아누스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가 암살되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새 황제로 선포되면서, 로마 제국은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후 군사력에 의해 옹립된 막사 황제들이 난립하면서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238년 6명의 황제의 해에는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 부자가 아프리카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고, 로마 원로원푸피에누스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세웠지만 이들 역시 프라에토리아 군단에 의해 살해되었다.[13][14][15][16][17]

이후에도 수많은 로마 장군들이 제위를 놓고 다투면서, 라인 강과 다뉴브 강 국경 너머 카르피족, 고트족, 반달족, 알레만니족 등 외적의 침입과 동쪽 사산 왕조의 공격이 잦아졌다.[18] 251년에는 키프리아누스 역병 (아마도 천연두)이 발생하여 제국은 더욱 약화되었다.[19][20] 260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에데사 전투에서 사산 왕조에 포로로 잡히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22]

이러한 혼란 속에서 제국은 갈리아 제국, 팔미라 제국 등 세 개의 경쟁 국가로 분열되었다.[21] 그러나 268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나이수스 전투에서 고트족을 격파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270–275) 반달족, 서고트족, 팔미라 제국, 갈리아 제국 등을 차례로 격파하고 274년 말까지 로마 제국을 재통일했다.[22]

아우렐리아누스의 암살 이후 다시 혼란이 이어지다가,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상황이 안정되기 시작했다.[22]

5. 1.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284년 근위대장관을 역임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군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즉위하면서 제국의 혼란은 일단락되었다.[22]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체제 개혁에 착수하여, 황제권을 강화하고 로마 황제를 오리엔트와 같은 전제 군주로 바꾸었다. 이로써 제국의 정체는 "'''원수정'''"(원수정)에서 "'''도미나투스'''"(전제 군주제)로 개편되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래 로마 황제는 실질적으로는 큰 권력을 가졌지만 명목상으로는 공화정을 준수하며 시민의 대표자로 행동해 왔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에는 명목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제국의 군주로서 군림하게 된다.

5. 1. 1. 사두정치(테트라르키아)

284년 근위대장관을 역임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군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즉위하면서 제국의 혼란은 일단락되었다.[1]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분할하여 통치하기 위해 심복인 마크시미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켜 영토를 동서로 양분하여 서방을 통치하게 하였다. 더 나아가 동서 각각의 황제 아래에 부제를 한 명씩 두어 두 명의 정제(아우구스투스)와 두 명의 부제(카이사르)의 총 네 명의 황제에 의한 분할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1]

이러한 여러 황제에 의한 통치 체제는 제국의 어느 지역에서 발생하는 변사에도 신속한 대응을 가능하게 하여 혼란의 종식에 크게 기여했다.[1]

이 체제는 '''사두정치'''(四分統治制)라고 불리며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퇴위 후에도 존속하여,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단독 황제로 즉위할 때까지 계속된다.[1]

6. 영향

3세기 위기는 로마 제국의 정치, 군사,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심각한 변화를 초래했다. 이 시기 동안 수많은 황제들이 난립하면서 제국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게르만족사산 왕조 등 이민족의 침입이 빈번해져 국토가 분열되거나 상실되는 등 로마 세계는 큰 혼란에 빠졌다.[21]

잦은 내전으로 군대의 병력이 줄어들었고, 대체 병력 징병은 노동력을 더욱 압박했다.[11] 키프리아누스 역병 (아마도 천연두)[19][20]과 같은 전염병으로 인한 대규모 사망은 제국을 더욱 약화시켰다.

세베루스 왕조 시대부터 시작된 통화 평가절하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야기했고,[35] 이는 경제 붕괴와 무역 네트워크 붕괴로 이어졌다. 주요 도시와 마을들은 방어벽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는데,[23] 이는 수세기 동안 요새가 필요 없었던 로마 제국의 상황이 크게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황위 계승 권한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아 군대, 원로원 등 여러 세력들이 황제 후보를 내세우면서 지속적인 내전이 발생했다.[23] 제국의 거대한 크기는 단일 통치자가 여러 위협에 동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사두정치를 통해 권력을 분산시키고,[24] 제국의 정체를 원수정에서 도미나투스로 바꾸어 제권을 강화했다.

이러한 혼란은 고대 로마에서 중세 사회로의 전환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앙 권력 약화, 지방 분권화, 농촌 경제 중심으로의 변화 등은 중세 봉건 사회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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